단편. Free Talk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졌다. 별이 꼬리를 달고 달려가는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분명 멋진 광경이었다. 소녀는 드문 일인 걸하고 멍하니 생각하다가 문득,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지만 별똥별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 였다. 소원을 빌지 못한 것은 분했지만 어쨌든 생전 처음 보는 별똥별인 것이다. 소녀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옆 자리의 소년을 돌아보자 그는 곤히 자고 있었다. 소녀는 입이 근질거려 오는 것을 참기 힘들었으나, 언젠가 엄마가 밤에 소란스레 구는 것은 실례라고 가르쳐 주었던 것을 떠올린 소녀는 꾹 참기로 했다. 분명 자신은 예의 바른 숙녀라고 생각 하면서도 소녀는 내일 아침 자신의 작은 자랑거리를 듣고 소년이 얼마나 부러워 할 것 인가에 대한 기대로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을 오늘 만큼 기다려 본 것은 소녀로써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눈을 뜨고 나니 나지막한 창문사이로 밝은 봄 햇살이 옷자락을 살랑거렸고, 참새의 지저귐이 짹짹대며 병실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소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어젯밤 본 별똥별의 일이었다. 금세 소녀의 시선은 옆 자리의 소년에게로 향했다. 소녀의 기대대로 소년은 먼저 일어나 멍하니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잠시 후 면 간호사가 올 테지만 아직까지는 단 둘만의, 약간 어색한 공간. 하지만 소년은 그런 것은 개의치 않는 듯 무표정했다.

!”

꽤나 익숙해졌다고 소녀는 생각했지만 아직 그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병실 안엔 소년과 소녀 둘 만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모르더라도 의사소통 하는 데에 큰 지장은 없었다.

소년은 소녀의 부름에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창문에 향해있던 시선을 소녀에게로 천천히 돌렸다.

몇 살이니?”

소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대한 살갑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소녀의 물음에 소년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세살.”

그럼 내가 누나네.”

짧은 대화. 소녀는 피식 하고 웃었다. 생각해보니 소년과 재대로 대화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소년은 부끄러운 건지, 당황한 건지, 아니면 뭔가 불만이 있는 건지 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소녀는 갑자기 답답함을 느꼈는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선 창문을 벌컥 열었다.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문득 자신의 침대위에 접혀있는 수북한 종이학이 눈에 들어왔다. 심심할 때 마다 틈틈이 접어서 병에 넣어둔 것인데, 어느새 이만큼이나 쌓여버렸다.

소녀는 그것을 한줌 집어 들고선 소년에게 쑥 내밀었다.

줄게, 선물.”

소년은 머뭇머뭇 그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것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소녀는 활짝 웃더니 빙그르르 돌아섰다.

있잖아, 별똥별 본 적 있니?”

소녀의 물음에 소년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난 봤다. 어젯밤에.”

소년은 소녀의 기대와는 다르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비죽 내밀었다.

소녀는 살짝 약이 올라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얼굴까지 푹 덮어써버렸다. 창문을 열어놨지만 조금 더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깨우는 소리에 소녀는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보니 익숙한 간호사였다. 어느새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 주사 맞자.”

안 맞으면 안돼요? 주사도 이제 지겹다고요.”

엄살 피우긴.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잖니.”

간호사는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약병을 톡톡 때렸다.

간호사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소녀는 언젠가 부모님이 얼마 안 있으면 퇴원이라고 말씀 하셨던 걸 기억해 냈다.

간호사가 나가고 병실엔 소녀 혼자만이 남았다. 옆자리를 돌아보니 소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퇴원하는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려보았다. 언제나 바라왔던 것이었지만 실감이 들지 않았다. 기분 좋은 일임에 틀림없었지만, 어젯밤 별똥별을 봤을 때처럼 들뜨지는 않았다. 동경해오던 창밖세계에 대한 두려움마저 드는 것 같았다.

텅 빈 병실 안은, 쓸쓸했다. 우두커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마치 소년과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병실안의 창문엔 붉은 빛 석양이 걸릴 시간이 되었다. 소녀의 부모님은 바쁜 일 때문에 잘 찾아오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번정도 만나는 편이었는데, 소년의 가족은 그 보다도 더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소녀는 내심 그의 부모님은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철커덕 하고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 인가 생각했더니 소년이었다. 열세 살 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조그마한 몸집. 사실 소녀도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들을 많이 본 것은 아니라 누군가 묻는다면 확실히 설명 하진 못했겠지만, 소년만큼은 작고, 연약해 보이는 것은 틀림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소녀보다도 오랫동안 병원에 있었을 테니까.

소년은 소녀의 시선을 잠시 마주바라 보더니 이내 말없이 자신의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 내일 퇴원이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잠시간의 침묵.

소년이 소녀를 돌아봤다.

…….”

언제나처럼 소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익숙한 눈동자. 익숙한 감정이 묻어났다. 하지만 조금, 쓸쓸해보였다.

잘됐네.”

짧은 대답. 소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소녀는 약간 심술이 났다.

종이학 돌려줘. 퇴원하면 가지고 갈 거니까.”

소년의 얼굴이 묘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소년의 손에는 소녀가 주었던 종이학 한줌이 들려있었다.

그것을 받아든 소녀는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정적이 흘렀다.

순간 뭔가가 휙, 하고 날아와 소년의 이마를 톡하고 때렸다. 소년이 그것을 살펴보니 종이학이었다. 소녀가 던진 것이었다.

소년은 어쩔 줄 몰라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소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소년에게로 다가왔다.

바보야, 너 다 가져.”

소녀는 새침한 얼굴로 종이학이 담긴 병을 내밀었다.

10시가 넘어가고 병실에 불이 꺼졌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우는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고 있었다.

있잖아, 별똥별 보고 싶지 않니?”

소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다시금 병실 안은 조용해졌다.

엄청 멋있다. 별똥별은.”

소녀가 벌써 소년이 잠들어버렸나 라고 생각할 들 때 즈음, 소년의 대답이 들렸다.

보고 싶어.”

그 대답에 소녀는 활짝 웃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 ! 이리와 봐! 창문에서 가까이 봐야 잘 볼 수 있어.”

소년은 소녀의 주문대로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켜 소녀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창문은 두 사람이 차지할 만큼 커다란 크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소년은 소녀의 뒤에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소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소녀의 어깨를 잡아끌어 창문 쪽으로 끌어 당겼다.

소년의 얼굴이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소녀는 자신보다 몸집이 컸다. 곁에 있으니 그 차이가 더 커 보이는 것 같아 자신이 조금 한심해졌다. 소년은 소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소녀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다. 그것 하나만으로 마음이 편해지고 부끄러운 기분 같은 건 이미 사라진 것 같았다.

쭉 기다리다보면, 언젠가 나타날 거야. 별똥별.”

소년은 소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아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똥별은 나타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 참, 그리고 별똥별이 떨어질 땐 꼭 소원을 비는 걸 잊으면 안 돼. 별똥별에게 소원을 빌면 분명히 이루어지거든.”

소녀의 얼굴에선 확실한 믿음이 묻어났다. 그 모습에 소년은 아까의 생각을 고쳐먹고 별똥별이 꼭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소년과 소녀는 창문가에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끝내 별똥별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과 소녀 모두 그것은 별 상관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소녀는 뭔가 소란스런 분위기에 눈을 떴다. 병실 안은 평소의 아침과는 사뭇 다르게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난 후, 소녀는 텅 빈 병실 안에 혼자 남았다. 그 소란의 와중에 소년이 바깥으로 데려져 나가는 것을 봤는데, 아무래도 늦게까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는데, 소년은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밤늦게까지 병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떤 날은 며칠씩 돌아오지 못한 적도 있었다.

소녀는 소년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못 한다는게 아쉬웠다.

점심시간이 되자, 소녀의 부모님이나 친척들이 찾아왔다. 다들 소녀의 퇴원과 쾌유를 축하하며 기쁘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정작 소녀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병실 안은 소녀의 지인들로 가득 차 있었으나, 여전히 쓸쓸했다. 활기찬 분위기는 소란스럽기만 했다. 굳게 닫힌 창문이 답답했다.

소녀의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날 저녁 어김없이 병실의 창문엔 고요한 석양이 내걸렸다. 소녀는 소년의 침대위에서 소년이 늘 그러하듯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리엔 자신이 건네준 종이학이 담긴 병이 곱게 놓아져있었다. 그 외엔 변변한 장식도 없는 삭막한 병실.

문득 소년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녀의 짐을 싸던 부모님에게 오늘 하루만 병원에 더 있겠다고 고집을 부려 소녀는 병실 안에 남았지만 여전히 병실은 쓸쓸했다.

소녀는 종이학을 접기로 했다. 종이학을 담아놓은 병은 아직 약간의 빈 공간이 남아있어서, 왠지 그것을 채워놓지 않으면 아쉬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소녀는 종이학 접기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병실의 불이 꺼졌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있었다.

소년은 끝내 밤늦게 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소녀는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일어서 창가로 다가섰다.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졌다. 어젯밤 늦게까지 기다리던 그 별똥별은 지금에서야 기다랗게 꼬리를 남기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별똥별은 한 개가 아니었다. 하나 둘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별똥별은 어느새 수십, 수백 개, 이내 눈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가 되어 소나기라도 내리는 것 같았다.

하늘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

소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소녀는 소원을 비는 것을 잊어먹고 말았다. 아니, 소녀는 소원을 빌 수 없었다.

어두컴컴한 병실 안은 조금은 차갑고, 조금은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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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면 손발퇴갤. 30분 생각하고, 최종 퇴고까지 3시간걸림. 원고료 8만원에 눈이 멀어서 썼지만, 교지 실리고도 내가까먹어서 고료 수령하는건 FAIL


연재 바꿈


겨울꽃 이름, 티로미아 - 2화 - Fatasy novel

그렇게, 요아힘 4세 이후로 아말레타 평원은 누만시아와 지속적인 영토 분쟁에 휘말린 것입니다. 칼루 협곡 바깥으로 펼쳐진 아말레타 평원은 쥬드레반으로서도 대륙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지리적 중요성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지요.”

수업을 진행 중인 역사 교수의 눈빛에는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거대한 회전을 눈앞에 둔 최전선의 병사의 그것과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 결의에 가득 찬 노 교수의 눈빛이 아니더라도, 아말레타 평원은 쥬드레반 왕국의 지리적, 상업적, 군사적, 그 외기타 잡다한 모든 것들의 요충지였다. 라스체노바 북단에 자리잡은 쥬드레반 왕국의 북쪽과 동쪽엔 빙해만이 자리잡고 있었고, 남쪽으론 험준한 뤼지예나 산맥이 수평으로 길게 뻗어있었다. 용의 꼬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 산맥은, 그 이름에 걸맞게 일부 숙련된 여행자를 제외하곤 넘어다니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결국 쥬드레반 왕국의 유일한 육로는 바다와 뤼지예나 산맥이 만나는 칼루 협곡이었다. 서쪽관문에 해당하는 이 곳을 지나면 펼쳐지는 곳이 바로 아말레타 평원이다.

극한의 기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머리맡에 위치한 서해 난류의 여향으로 11모작이 가능했고, 땅 또한 비옥했기 때문에 라스체노바 북부 최고의 노른자위 땅이었다. 덕분에 이웃나라인 서쪽의 누만시아는 오래전부터 땅에 대한 소유권을 차지하려해왔고, 지리적으로 별 관계가 없는 남쪽의 에스무르마저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땅이었다.

사실 아말레타 평원은 법적으론 쥬드레반의 영토였으나, 교역이 활발한 지역이다보니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었고, 쥬드레반 토착민의 비율은 채 절반을 넘지 못한 곳이었기에,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러다 결정적으로 영토 분쟁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아말레타 평원에 영지를 갖고 있던 요아힘가문에서 누만시아 왕녀를 신부로 맞아들이게 되면서, 누만시아가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나선 것이다. 50년간 계속된 이 분쟁은 쥬드레반 왕실의 가장 커다란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당시, 그런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결혼을 한 요아힘가문이나,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본 쥬드레반 왕실이나, 무슨 생각이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역사란 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 당시로 돌아가 보지 않는 이상, 진실은 알 수 없다.

머릿속으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프레비안은 그저 묵묵히,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성실한 학생역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그의 얼굴에서는 뛰어나지도 떨어지지도 않는 평범한 학생의 표정이 그려져 있었지만, 너무나 완벽하게 몰 개성한 그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 다른 학생들과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미 누구나가 그가 각성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나자, 약간 늦은 오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엘티컷의 해는 생각보다 금방 떨어진다. , 하는 순간 주변을 둘러보면, 이미 어둑어둑 해져 있는 것이다. 오늘 저택안의 고용인들은 전부 휴가를 떠나서 마부는 오지 않을 것이다. 프레비안은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기에 일부러, 프레비안은 마부가 한사코 그를 데리러 오고 나서 휴가를 가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프레비안이 소용돌이를 따라서 걷고 있는데, 한 무리의 학생들과 마주쳤다.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 뭐야, 체르니가의 괴물자식인가.”

길을 막고선 이들 중, 가장 앞에선 소년-금발 벽안이 인상적인-이 입을 열었다.

글세, 괴물인지 어떤 진 모르겠지만, 볼일 없으면 길 좀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알버트

프레비안이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그들 무리의 리더인 듯한 알버트란 소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금 독설을 내뱉었다.

괴물주제에 내 이름을 입에 담지마. 너희 같은 각성자들은 언제 미쳐서 날뛸지 모르는데 그런 미치광이들이 내 이름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역겹다고.”

뒤에 서있던 그의 패거리들이 기분나쁘게 키득거렸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던 그건 네 자유인데, 나는 지금 너 따위 하고 논쟁을 하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 않아.”

프레비안은 감정의 변화 없이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어련하실까.”

알버트는 비릿하게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묵묵히 프레비안이 그들을 지나쳐 가는 순간, 그들 무리 중 누군가가 프레비안의 오른쪽 소매를 잡아 챘다.

찌익, 소리와 함께 두터운 블레이저 소매가 찢어져나갔다.

옷이 찢어져 드러난 그의 팔엔 선명한 검은색 문양이 나무뿌리처럼 이리저리 뻗어나 있었다.

스티그마, ‘각성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대죄의 낙인은 프레비안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푸핫, 역시 누가 괴물 아니랄까봐, 괴물은 괴물답게 표식을 꺼내놓고 다니란 말이야. 그렇게 숨겨놓는 건 예의가 아니지!”

낄낄거리는 알버트 패거리의 웃음소리가 마젤라슈 정원에 울려퍼졌다.

…….”

프레비안은 화는 나지 않았다. 다만 이 귀찮은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이런 일에 일일이 화를 내기엔 그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겪어왔으니까.

피식 웃고 발걸음을 떼는 프레비안의 모습이 더 마음에 안들었는지, 알버트는 그의 등 뒤로 조소를 날리며 입을 열었다.

, 형은 패륜아에 동생은 각성자라니, 아니, 이제 동생이 아버지를 죽일 차례인가?”

킥킥대며 멀어지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온다.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속삭임.

, 너무 약해.

수천 번도 더 들어 귓가에 새겨져버린 그 목소리.

그러니까,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프레비안은 옷이 찢겨져 드러난 자신의 손목을 매만졌다.

나를 미워하고, 꼭 다시 나를 찾아와라.

, 뭐라고 했어?”

프레비안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알버트 패거리는 듣지 못했는지 자기들끼리 뭔가 떠들기에 바빴다.

프레비안은 그들의 등뒤로 다가가 알버트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알버트, 방금 뭐라고했냐니까?”

알버트는 의아한 얼굴로 프레비안을 돌아봤다.

뭐야? 그 손, 저리 안 치워? 죽고 싶냐?”

알버트는 프레비안의 손을 쳐내려다 그의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와 마주치곤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의 심장까지 저릿한 한기가 스며들어오는 것 같은 지독하게 차가운 눈빛이었다.

내가 지금 묻잖아, 방금 뭐라고 했냐고.”

프레비안의 눈빛에 주춤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알버트는 오히려 더 이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 맞는 말을 한 것 뿐이지! 너희 형은 패륜아에, 넌 차기 패륜아라고 했다. 틀렸냐? 푸하하!”

그리곤 프레비안의 손을 쳐내곤, 정색하며 비웃던 표정을 지우고 그를 노려보았다.

순간, 프레비안의 손이 뱀처럼 움직이며 알버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 , 이 자식!”

그 순간적인 속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알버트와 패거리들은 당황했다.

알버트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올랐다.

죽여버려!”

알버트가 외치자 그의 패거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며 프레비안에게 주먹을 날렸다.

주먹이 뻗어져 나가려는 찰나, 타악, 소리가 나며 누군가가의 손이 프레비안을 향해 날아오던 주먹을 잡아챘다.

그만하시죠. 여러분.”

프레비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막아선 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에 자신보다 주먹하나정도 큰 소년,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 이 새끼, 분명 렐메일에서 왔다던

알버트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알버트의 말에 대꾸하기보단 알버트의 멱살을 잡고 있던 프레비안의 손 위에도 자신의 손을 올리며, 프레비안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 무언의 표현은 왠지 무게감이 있어, 그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프레비안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것을 깨닫곤 복잡한 감정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더 싸우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버렸다. 결국 뒤돌아 생각해보면 유치한 조롱일 뿐인 것이다. 프레비안은 조그마한 한숨을 내쉬곤 알버트를 붙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의 손에서 풀려난 알버트는 분이 안풀렸는지 씩씩대며 소리쳤다.

너 이 새끼들 전부다 죽고 싶어서 날뛰는구나!”

소년은 알버트의 외침에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조용히 대꾸한다.

여럿이서 한명한테 덤비는건 비겁한 짓입니다.”

알버트 입장에선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다.

꺼져! 어딜 천한 놈이 나서서!”

알버트가 소년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는 찰나, 나지막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 해둬. 더 이상 일을 벌렸다간 나도 정식으로 학생회에 고발 할 테니까. 그건 너도 바라지 않겠지?”

연한 푸른빛이 섞인 은발이 인상적인 소녀였다.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고고하게 빛나며, 알버트들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 쓰레기 같은 것들이……. 가자!”

알버트는 소녀를 가느다랗게 노려보더니 체념한 듯 패거리를 이끌고 사라졌다. 그들이 멀찍이 떠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소녀가 입을 열었다.

, 신귀족주의라니 꼴 값 떨고 있군. 저런 덜떨어진 것들이 귀족이라는 사실부터가 같은 귀족으로써 부끄러운데 말이야. 가자, 로멜.”

로멜이라 불린 소년은 그녀의 시종이었는지, 프레비안에게 고개를 꾸벅 하더니 소녀의 등 뒤를 따랐다. 천천히 떠나가는 소녀와 프레비안은 고개를 돌려 잠시 동안 서로 마주보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프레비안은 이미 그것만으로 서로가 서로의 내면에 잠든 얼음 같은 심장을 마주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겨울꽃 이름, 티로미아 - 1화 - Fatasy novel

첼로디 저택은 고상한 고전 양식으로 지어진 아담한 크기의 저택이었다. 공작가의 저택이라기엔 소탈하다 못해 소박한 크기였지만, 척박한 라스체노바의 땅에선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그러했다. 건축물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실용적인 면을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옛날 선조들이 그랬듯이 생존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주드레반 왕국은 라스체노바 대륙 북단에 위치한 커다란 왕국이었지만, 대륙과의 경계선으로 삼는 뤼지예나산맥 덕분에 고립되어있다시피 한 형세라, 독자적인 문화와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지형적 이점으로 인한 오랜 평화 덕에 귀족문화 역시 많은 부분 퇴색하여, 지금에 와서는 명예직과도 비슷한 위치가 되어버렸다. 물론, 귀족들만의 특권은 아직까지 존재하지만 주드레반 왕국에서 일반 평민들에게 귀족이란 마을이나 도시의 유지 정도 수준으로 인식된다.

첼로디 가문의 소공자 프레비안 역시 주드레반 왕국 귀족의 그러한 위치에 만족했다. 어찌되었든, 자신은 특권층인 것이다. 그럼에도 하위층과 큰 갭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인 것이다.

프레비안은 저택 안, 자신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침부터 기분 나쁜 악몽을 꾼 뒤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의 방이 위치한 2층 가운데에는 커다란 홀이 있는데, 그곳엔 지금까지의 첼로디 가문 수장들의 초상화가 빙 둘러서 걸려있다. 프레비안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초상화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아, 왠지 머쓱해지곤 한다. 허나 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는데, 정확한 간격으로 깔끔하게 배열되어있는 초상화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얼굴 하나를 일부러 떼어내기라도 한 듯 딱 초상화 한 장 분량의 공간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피아노 건반이 하나 빠져버린 것처럼, 그곳은 불안한 위화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초상화 밑에는 가문의 문장인 흑요석 빛의 세 가지 나무와 그의 어머니의 출신 가문 문장이 대리석에 새겨져있고, 기본적인 신상정보 또한 새겨져 있었는데, 그 빈 부분에는 그것마저 깔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초상화가 아니더라도 다른 무언가로 채울법도 하건만 완고하게도 그곳만큼은 프레비안이 태어나기 전부터 꿋꿋이 빈 대리석 벽으로 남아있었다.

매일아침 1대부터 24대 가주인 아버지의 초상화까지 천천히 하나씩 머릿속에 새겨 넣는 것은 프레비안의 일과였다. 초상화가 자리 잡은 액자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스쳐갈 때마다, 프레비안은 왠지 모를 만족감을 느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고, 사실 그는 이미 이일을 시작하자마자, 선대 가주들의 연표를 전부 외워 버렸으나, 무슨 연유인지 비어있는 초상화자리를 볼 때마다. 이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도 없이 되새겨보아도, 그 공허한 빈공간이 채워질리 없었건만 매일 아침 한 번씩 그 복도를 지나지 않으면, 또 다른 초상화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불안했다. 날마다 머릿속에 새겨두지 않으면 잊혀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사색에 잠겨있던 프레비안은 2층 테라스 밑으로 들리는 말의 투레질 소리에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바깥으로 향했다.

 

체르니가 저택입구 앞, 조용한 거리에서 새하얀 마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 문 위에 새겨진 체르니가의 문장이 그 마차가 체르니 가의 소요물이라는 것을 당당히 나타내고 있었다.

그가 마차 앞으로 다가서자, 체르니가의 고용인인 마부가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마부는 40대 중반정도의 호리호리한 체격의 중년인 이었다. 제법 나이가 있었지만, 왠지 옷을 벗고 보면 다부진 몸매의 소유자일 듯싶었다(라스체노바에선 타인의 맨살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기에 확인하지는 못했다.)프레비안은 그를 매일 볼 때마다 참 멋들어진 콧수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엘티컷 처럼 조용한 남자였고, 쓸 떼 없이 입을 여는 경우는 없었다. 덕분에 체르니가 에서도 그를 신뢰하고 있는 거겠지만.

마차 창문에 서리가 낄 정도로 추운 아침이었으나, 의외로 마차 내부는 훈훈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은은하게 붉은 빛을 뿌리고 있는 주먹만 한 구슬 몇 개가 눈에 띄었다. 아마 옆 대륙에서 온 수입품 일거라고(그쪽은 마법 물품이 상당히 발달해서 그쪽 분야에 생산품이 많았다.)짐작하며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댔다. 지금에 와서 귀족과 평민의 차이란, 결국 이정도 사치 밖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프레비안은 묘한 감상이 들었다.

프레비안이 마차안에 자리잡은 것을 확인한 마부가 조용히 마차를 출발시켰다.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가 프레비안의 귓가를 간질였다. 마부는 언제나 한결같은 남자였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속도로 마차를 몬다. 그 역시 그가 하고 있는 일에선 누구보다 자신 있는 권위자 일 것이다. 밥을 먹거나 세수를 하는 것처럼 일상이 되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마차안에 몸을 묻고 있으니, 프레비안에게 아침의 노곤함이 몰려들었다. 목적지인 마젤라슈 학원까지는 대략 15~20분정도 걸릴 터였다.

밀려오는 졸음을 쫒아내 볼까싶어 성에 낀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슥, 하고 훔쳐내 본다. 주드레반 왕국의 수도인 엘티컷은 일국의 수도인 만큼 거대한 대도시 중 하나였지만 창밖에 펼쳐진 거리는 고요했다. 거리를 따라 흘러 내려가는 인파들은 두런두런 몇 마디씩을 나누며 제각기, 제 할 일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새벽같이 이른 시간이 아니어서 인적이 드문 시기는 아니었지만, 엘티컷은 태생적으로 고요함과 고독함을 간직한 도시였다. 도시사람들은 조용한 것을 좋아했기에 스스로 시끄러운 것을 삼갔고, 겨울 대륙이었음에도 눈보라가 휘몰아쳐 대는 일도 없었다. 그런 엘티컷에서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어스름에 홀로 한적한 변두리 거리를 걸으며 먼 곳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오래된 한 폭의 수채화 속에 번지기라도 한 듯 고풍스러운 도시의 향취를 한 껏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프레비안에게는 그랬다.

유리창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자니 포근하면서도 쓸쓸해서 어딘가 슬퍼보이는 그 변두리의 거리가 겹쳐지는 듯 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엘티컷의 모습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 즈음 익숙한 거리의 풍경을 지나 양 옆으로 가로수가 늘어서있는 잘 정돈된 도로로 들어섰다. 왕립 마젤라슈 학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라스체노바에 찾아오는 여름이 반짝 빛나고, 다시 겨울로 접어드는 가을의 막바지에 양쪽에 늘어선 가로수들이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단풍으로 매년 장관을 연출했기 때문에 엘티컷 사람들은 이곳을 단풍길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온통 흰 눈에 뒤덮인 단풍길은 새하얗게 부서지는 백색 일색으로 그것은 그 나름대로 괜찮은 모습이라고 프레비안은 생각했다. 곳곳에 피어난 하늘색 티로미아가 새하얀 공백을 점점이 채워주었다. 라스체노바 유일의 겨울 꽃이었다. 그 덕에 꽃 자체도 아름다웠지만, 주드레반 왕국에서는 겨울의 상징과도 같은 꽃이 되었다.

200m쯤 이어진 기다란 단풍길을 따라 올라가면, 검게 도색된 커다란 정문이 학생들을 맞아준다. 하루에 한번씩 열리고 닫히지만, 프레비안은 문이 닫혀있는 모습은 아직까지 본적은 없다. 사실 저렇게 커다란 문을 매일 열고 닫는 일도 꽤나 피곤할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프레비안 보다 일찍 도착한 이들도 상당수 있었기에, 웅장한 학원 건물은 인적으로 북적대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자 프레비안은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깥 공기가 훅, 하고 얼굴로 밀려들었다. 마차 아래로 내려서자 타닥, 하고 대리석의 딱딱한 감촉이 발끝으로 전해져왔다. 학원 내 구역은 간밤에 내린 눈은 벌써 깔끔하게 치워 논 모양이었다. 학원 쪽으로 돌아서니 마부가 프레비안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프레비안은 가볍게 답례를 하고, 학원으로 향했다.

 

왕립 마젤라슈 학원은 크게 3개의 건물이 정 삼각형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데, 각각의 건물 외곽과 가운데에 이동 통로를 만들어놔서 커다란 삼각형 안에 연결 통로로 이루어진 작은 삼각형이 하나 더 자리 잡고 있는 구조였다. 단풍길에서 학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왼쪽에 위치한 것이 달의 관이고, 오른쪽이 태양의 관이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마주선 건물이 하늘의 관으로 각각의 관마다 교육하는 과목이 달랐다. 달의 관에선 전술학이나 각종 무투술 같은 군사 분야를 교육했고, 태양의 관에선 수학, 과학이나 인문학, 음악, 미술 같은 지식, 예술 분야를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하늘의 관에선 정치, 경영, 역사, 예법 등의 귀족 전문 분야를 교육한다. 이 때문에 원칙적으로 마젤라슈 학원의 입학조건에 신분 제한은 없었으나, 대부분의 고급 사립학교가 그러하듯, 마젤라슈 학원은 귀족 전문 교육기관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물론 비싼 수업료가 가장 큰 진입장벽의 역할을 대신했지만).

 

단풍길 끝에 있는 정문을 지나고 나면 학원 내 중앙도로로 연결되는데 이곳 역시 잘 포장해 놓아 걷기엔 좋은 곳이었다. 도로 주위론 잔디밭이나(물론 지금은 겨울이라 눈밭이었지만) 벤치, 각종 조형물 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날씨가 좋은 여름날에는 도시락을 싸서 학원생들끼리 피크닉을 즐기곤 하는 곳이었다.

단풍길에 이어지는 이 학원내 보도의 이름은 소용돌이였다. 이름처럼 빙글빙글 꼬여있는 길은 아니었으나 오래 전부터 전해져온 이름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소용돌이 수준까진 아니었으나 세 개의 관들로 이리저리 연결되어 복잡한 모습이긴 했다. 아마 처음 이름을 붙인 학생은 조금 길치 끼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프레비안은 소용돌이안에서 길을 잃고 헤메는 누군가의 모습을 상상하곤 피식 웃고말았다.

고풍스런 정취의 학원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소란스런 이름이었지만, 학원 사람들은 누구나 소용돌이를 타고 움직였고, 그것은 어찌되었든 마젤라슈 학원에선 없어선 안 될 존재인 것이다.

소용돌이를 따라 옆길로 새지않고 직선으로 쭉 따라가면 나오는 곳이 태풍의 눈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태풍의 눈은 광장의 중앙 이었는데, 광장의 중앙엔 로메누스 여신을 본뜬 아담한 크기의 분수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대 신화속에서 지혜와 혁신을 관장하고 있다는 그녀와 태풍은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사실 그곳에 그러한 이름이 붙게 된 것이, 그녀와는 전혀 상관없었다는 것을 안다면 조금쯤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태풍의 눈은 그 이름답게 각 관 끼리 연결된 세 개의 내부 공중 통로가 겹쳐지면서 정 중앙에 위치한 여신의 분수상에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모습은 늘상 장관을 연출했다.

태풍의 눈은 학원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여서, 분수상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혹한의 추위에도 얼지 않았다. 어떤 장치가 되어있다고 들은 것 같았다.

프레비안은 늘 학원을 거닐 때마다 단순한 교육기관인 주제에 너무 호화스럽게 지어진 건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실제로 왕궁 역시 규모만 이보다 컸을 뿐이지, 건물의 미학이라던가, 정취에 있어서는 한 수 접어줘야 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마젤라슈 학원은 엄밀히 말하면 라스체노바의 건물이 아니었다.’ 그 화려하고 웅장한 외관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라스체노바 사람이 맞긴 한 것일까.

왠지 프레비안은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가 누군지 알고 싶어졌지만, 이내 쓸 데 없는 곳에서 심각해져 버린 것 같아, 실소하고 말았다. 옆에 있던 로멜은 그런 프레비안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낭비가 확실하지만 프레비안을 비롯한 다른 학생 입장으로써도 학원 시설이 좋으면 나쁠건 없었기에 불만은 없었다. 좋은게 좋은 것 이었으니까. 아니, 사실 어쩌면 그 비싼 수업료가 건물 유지관리에 들어가는 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니 프레비안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해졌다.

학원 내에 수업시작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예비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프레비안은 걸음을 서둘렀다. 하늘은, 여전히 시리도록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요아힘 4세 이후로 아말레타 평원은 누만시아와 지속적인 영토 분쟁에 휘말린 것입니다. 칼루 협곡 바깥으로 펼쳐진 아말레타 평원은 쥬드레반으로서도 대륙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지리적 중요성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지요.”

수업을 진행 중인 역사 교수의 눈빛에는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거대한 회전을 눈앞에 둔 최전선의 병사의 그것과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 결의에 가득 찬 노 교수의 눈빛이 아니더라도, 아말레타 평원은 쥬드레반 왕국의 지리적, 상업적, 군사적, 그 외기타 잡다한 모든 것들의 요충지였다. 라스체노바 북단에 자리잡은 쥬드레반 왕국의 북쪽과 동쪽엔 빙해만이 자리잡고 있었고, 남쪽으론 험준한 케펠 산맥이 수평으로 길게 뻗어있었다. 용의 꼬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 산맥은, 그 이름에 걸맞게 일부 숙련된 여행자를 제외하곤 넘어다니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결국 쥬드레반 왕국의 유일한 육로는 바다와 케펠 산맥이 만나는 칼루 협곡이었다. 서쪽관문에 해당하는 이 곳을 지나면 펼쳐지는 곳이 바로 아말레타 평원이다.

극한의 기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머리맡에 위치한 서해 난류의 여향으로 11모작이 가능했고, 땅 또한 비옥했기 때문에 라스체노바 북부 최고의 노른자위 땅이었다. 덕분에 이웃나라인 서쪽의 누만시아는 오래전부터 땅에 대한 소유권을 차지하려해왔고, 지리적으로 별 관계가 없는 남쪽의 에스무르마저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땅이었다.

사실 아말레타 평원은 법적으론 쥬드레반의 영토였으나, 교역이 활발한 지역이다보니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었고, 주드레반 토착민의 비율은 채 절반을 넘지 못한 곳이었기에,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러다 결정적으로 영토 분쟁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아말레타 평원에 영지를 갖고 있던 요아힘가문에서 누만시아 왕녀를 신부로 맞아들이게 되면서, 누만시아가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나선 것이다. 50년간 계속된 이 분쟁은 쥬드레반 왕실의 가장 커다란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당시, 그런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결혼을 한 요아힘가문이나,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본 쥬드레반 왕실이나, 무슨 생각이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역사란 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 당시로 돌아가 보지 않는 이상, 진실은 알 수 없다.

머릿속으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프레비안은 그저 묵묵히,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성실한 학생역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그의 얼굴에서는 뛰어나지도 떨어지지도 않는 평범한 학생의 표정이 그려져 있었지만, 너무나 완벽하게 몰 개성한 그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 다른 학생들과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미 누구나가 그가 각성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겨울 꽃 이름, 티로미아. - 프롤로그 - Fatasy novel

엘티 컷의 겨울은 고요하다. 그 고요함 탓에, 엘티 컷 사람들은 그곳 겨울의 모습에서 늘, 전설 속에 전해져 내려오는 은빛 늑대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특별히 어디가 닮았다거나 꼬집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새싹을 보면 봄이 온 것을 새삼 알아차리는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은빛늑대 전설이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엘티 컷의 누구라도 은빛늑대는 알고 있었다. 엘티 컷의 겨울은 그 전설의 존재의 시린 송곳니처럼 뼛속 깊숙이 파고드는 무언의 냉기가 스며있었으니까.

눈보라가 미쳐 날뛰지도, 칼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 사무치는 냉기에 소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르르, 몸서리쳤다.

사실 라스체노바가 겨울 대륙으로 존재하는 이상 어딘들 다르겠냐만, 소년에겐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임에도 그곳의 추위에 적응하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었다. 이런 극한의 땅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볼 때마다 소년은 자신의 나약함이 드러나는 것 같아, 감탄 섞인 자조를 내뱉곤 했다.

뽀드득, 뽀드득

순백의 눈길에 소년의 발자국이 하나둘 아로 새겨졌다.

간밤에 눈이 내린 모양이었다. 늘 상 눈으로 뒤덮여 있다 보니, 눈길보다 맨땅을 보기가 더 힘든 곳이었지만 티끌 하나 없이 순결한 눈 위에 발자국을 만드는 것은, 늘 설레는 일이었다.

동심의 즐거움이었으나, 누군가는 유치하다며 비웃을 지도 모르는 일. 허나 소년 그 자신도 아이는 아니었으나, 유치함을 운운할 정도로 성큼 어른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소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앙상한 가로수 몇 그루가 기둥처럼 떠받히고 있는 그곳엔, 광활하고 청명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새벽녘에 차가운 눈송이들을 뿌려낸 다음인지라 귀여운 조각구름 몇 개만이 하늘거리고 있을 뿐, 쾌청한 날씨였다.

그때, 산 너머에서부터 여명을 비추고 있던 태양이 살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순식간에 눈 덮인 대지가 새하얗게 백열하며, 온 세상이 반짝거렸다.

소년은 손을 올려 손차양을 만들었다.

바람소리가 잠든 그곳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어두운 밤, 아니 어쩌면 깊은 새벽인지도 모른다. 주변은 적막한 고요에 휩싸여있다.

철벅 철벅 -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나지막한 발소리가 정적을 밀어냈다.

하지만 이상했다. 단단한 바닥과의 접촉음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끈적한 그 소리는 마치

그제서야 어린 소년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 온통 검 붉은색으로 칠해진 벽과 바닥은 커다란 물감통을 쓰러뜨린 것처럼 난잡했지만, 그만큼 확실하게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 앞에 쓰러져있는 여성. 자신의 어머니, 라고 생각해도 좋을 그 한없이 아름다운 여성은 이미 주변을 가득 메운 붉은색 액체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자신 주변의 바닥마저 붉은색 웅덩이로 메워 가고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았지만, 그 따뜻한 액체를 마주하고도, 그것은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존재였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것은 너무도, 현실감이 없는 광경이었다. 이것은 꿈이 아닌가, 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아니, 분명 그것은 꿈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소년의 기억.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소년은 아마 우는 것도 잊어버렸던 것일까.

모두, 모두 죽어 버렸다. 어제 함께 얼굴을 마주치던 모든 생명이 철두철미하게 사라져버렸다.

죽음 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기엔 소년은 아직 너무 어렸지만, 생물의 본질적인 본능은 그것을 죽음이라는 것 외에 달리 지칭할 만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온통 붉은색 천지인 주변에 한 방울 떠있는 기름처럼 겉돌고 있는 시린 푸른색 장발의 청년이 서있었다.

자신의 귓가에 들려온 그 끈적한 발소리는 그가 만들어낸 것이리라.

아니, 발소리뿐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것이다.

오지마, 오지마.

소년은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었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고개를 숙여 자신과 눈높이를 맞춘다.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얼굴을 부드럽게 스쳐지나간다. 붉은색 선혈이 그 움직임을 따라 자취를 남긴다. 눈 밑에 붉은색 수평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볼을 타고 방울져 흘러내린다. 소년이 잃어버린 것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 결과물에 만족한 듯, 입 꼬리를 말아 올린 그는, 소년의 귓가로 입을 가져가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 너무 약해.

그가 조용히 소년의 오른쪽 어깨를 잡았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순간, 전신의 감각을 관통하는 격렬한 통증이 치달렸다.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나를 미워하고, 꼭 다시 나를 찾아와라. 그리고 울지 마라, 다시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

그것이 소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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